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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실존 주의자 샤르트르! 노벨문학상은 거부하고 보봐르와 결혼, 슈바이처, 레비스토르스와의 관계

by 연구일인 2023. 9. 8.

실존 주의자 샤르트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알베르트 까뮈와 묘한 라이벌 관계였던 샤르트르....

샤르트르
샤르트르

 

사르트르(Sartre, J. P., 1905~1980)의 생애

사르트르는 190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해군장교였던 아버지의 사망으로  외가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는 160cm의 작은 키, 사팔 눈, 금속성의 목소리, 외모는 못 생겼던 듯합니다. 그래서 친구가 없었다고 하는데, 요즘식으로 말하면 왕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책을 유난히 좋아했다고 하는데요, 샤르트르의 놀이터는 할아버지의 서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지성과 유머 감각, 배려심 등을 가질수 있었고 이런 점들이 여성들을 매료 시켰다고 합니다. 

 



 

샤르트르는 한꺼번에 네명의 애인을 데리고 있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한 명의 여인은 자신을 노예로 만들지만 여려 명의 애인은 자신을 해방시킨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멋진 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보봐르(1908 ~ 1986)

샤르트르 주위에 유명한 분이 많은데요, 첫째는 시몬드 보부아르(1908 ~ 1986)는 사르트르와 애인 관계입니다.  이분도 정말 유명합니다. 떠오르는 명저가 “제2의 성(1949)”인데 이분 역시 페미니스트이고 실존주의자입니다.

혹시 잘 모르신다고 해도 들어본 말은 있죠.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50년 동안이나 지속됩니다. 사르트르는 23세, 보부아르는 21세였을 때, 두사람은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시험에서 사르트르가 1등을, 그리고 보부아르가 2등을 했습니다. 둘은 계약결혼을 합니다. 계약 결혼(보봐르)? 자유로운 동거를 시작하는데, 누군가 헤어지자 그러면 헤어지는 조건이었습니다. 근데 이 계약 결혼은 샤르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1980년, 사르트르는 7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고 그의 장례식에는 2만 5천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샤르트르샤르트르샤르트르
샤르트르

 

 

레비스토로스

우리에게 ‘슬픈 열대’란 책으로 유명하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도 친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1908~2009)는 1908년에 태어나서 2009년에 타계했으니 102세! 한 세기를 넘게 삽니다. 벨기에 태생이지만, 6살 때 부모님이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에서 살았고 파리대학을 나왔습니다. 샤르트르와는 오랜 친구 사이로 둘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둘은 격론을 펼치고 절교했다고 합니다.

 

샤르트르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진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진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샤르트르에게도 진보와 문화 미개한 문화가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어느 문명이든 우월하거나 열등한 문명은 없다!’는 것이죠

그들 나름의 자연적·사회적 여건에 따라·저마다의 사유와 지혜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죠.

 



 

슈바이쳐

샤르트르의 외가 쪽에서 유명한 사람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아프리카의 아버지? 알버트 슈바이처입니다.샤르트르의 어머니는 안마리 슈바이처로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사촌이었습니다. 샤르트르와는 5촌인 거죠.

 

 

노벨 문학상 거절하다.

노벨상은 이 집안과 관련이 깊은가 봅니다. 1964년 사르트르는 소설 『말』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됩니다. 그런데 샤르트르는 노벨상을 거절합니다.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작가를 분류하고 문학을 등급 매기는 것”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샤르트르는 노벨상을 거절하면서

‘어떠한 인간도 살아생전에 신격화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상을 거부한 이유 중에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발도 있었는데요,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사르트르는 이 상을 가능하게 만든 군사적인 문화에 반대했던 그의 정치적인 견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미국 코넬 대학의 강의 요청도 거절합니다. 그리고 수상자가 서양에 편중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작가에게는 한 번도 상을 수여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자본주의 단체에 매수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상을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죠.두 차례의 커다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 어찌 보면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존재하는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도 대단했습니다. 샤르트르의 집필을 돕기 위해 그의 거주지 근처에 비행 금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이런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샤르트르가 살던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실존주의자가 있었습니다. 샤르트르와 쌍벽을 이루었고 나이는 샤르트르보다 8살 정도 어린 알베르 까뮈(1913-1960)입니다.

 

‘시시포스의 신화’ ‘이방인’ 등을 썼던까뮈가 1957년에 최연소(45살?)로 노벨문학상을 탑니다. 샤르트르보다 7년 먼저 탄 거죠.

그래서 기분 나빠서 안 탔을 거라는 거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상 링크 첨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