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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공자는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

by 연구일인 2023. 2. 17.

1999년에 두권의 책이 나왔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 1999)와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최병철 1999)! 유가 사상이 중국에 가장 오랜 시간 지배적인 사상일수 있었던 것은 지배층의 철학이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

실제로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도 民(민)과 人(인)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우리가 들었던 위민, 민본 백성을 위한다.

공자 공자공자
공자를 살리자 또는 죽이자

 

 

 

"백성이 근본이다." 이런 단어가 있는가 하면 애인 사람을 사랑해라.

그런데 주로 공자가 사용하는 사람의 의미는 주로 지배층의 의미를 갖는다. 사실 이건 시대를 이해한다면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다. 서양조차도 인간이 존엄이라고 할 때, 그 인간은 모든 인간의 의미가 아니었다. 20C가 되어서야 나오는 이야기니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조선 500년 통치 이념이 유가였으니, 공자라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우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까? 

유적지(경제학 : 얼마나 할까? 역사 - 어떤 역사적 사실? 예술적 가치?, 
길을 물어보면 직업을 안다. (조폭, 의사, 학생) 
카페(건축학, 상대) 

그럼 공자의 철학에 가장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사상이 正名(정명)론인데, 사실 이 정명적 사고가 현대사회에 맞는가? 이게 가장 큰 쟁점일 것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君君臣臣(군군신신)父父子子(부부자자) 그럼 정명은? 바를 정자, 이름 명자다. 

여기서 이름은 '석열', '재인' 등이 아니라 신분, 직분, 지위 이런 의미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신분이나 지위를 붙이는 이유는 그 이름에 맞는 알맞은, 올바른 역할 즉, 의무가 있다는 것. 그래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그렇다면 이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들은 특히 그랬던 것 같다. 부모라고 불리는 순간, 선생이라고 불리는 순간, 자신의 역할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게 지금의 한국을 만든 것은 분명해보인다. 따라서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수 없다.

그러면 문제는 없을까?
물론 정명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조금 쉽게 이해해 보자. "개는 개다워야 한다." 즉, 개처럼 살아야지, 개가 '야옹'하거나 또는 날아다니면 개답지가 않은 것! 그러니 개는 개다워야 한다. 유가에서 본다면 요즘 개는 개다우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다들 분수에 따라 살야야 한다는 거다.

여기서 우리가 자주 쓰는 ‘名分(명분), 分數(분수)’란 말을 알아보자.

 

우리가 생활속에서 "명분이 없어...", "분수를 몰라!" 이렇게 하는 말은 모두 정명의 사고다. 명분(名分)은 이름 명 나 눌 분. 그러니 ‘각각의 이름(신분)에 따라 할 일을 나누어 논 것이다. 그러니 그 이름(신분)에 맞는 도리’를 말한다. 그러니 지 일이 아닌 것 할 때 명분이 없다는 뜻이 된다. 또, 우리 쓰는 말. 지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를 모른다. 나눌 분, 셈 수. 명분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쉬운데 "명"이 있다. "명"에 따라 할 일을 나누었다. 그래서 그 나눈 일에 대한 한계, 그게 분수다. 그러니 분수(分數)란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공자의 이름에 맞게 이름값을 하자는 정명(正名)사상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옹호하는 한계점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정보사회인지라 정명은 창의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명은 필요한가?

결론 부터 이야기 하면 '필요'하다! 사회는 다양한 일을 필요로 하고, 분업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더욱이 요즘의 정치를 보면 정명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명에 따른 정은 필요하지만 명에 위계가 없고, 언제든 명이 바뀔수 있는 사회여야 되지 않을까?

 


공자의 이력과 정치적 경력


공자 24살에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하급관리를 몇차례 하게 된다. 말을 기르고 관리하거나, 창고를 관리하는 관리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자가 일을 맡으면 모두 잘 해냈다고 한다. 공자는 약 35세 무렵부터 학문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고 51세 때부터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데 55세에는 대사구(大司寇 ; 법무부 문화부 장관)가 되었고, 56세에 재상의 직을 겸하기도 하는데 그때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겠다고 당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던 최고위 권력자들을 처형하는 등 소신껏 정치를 펼쳤다.   

 

주유천하(周遊天下)


노나라의 세력이 공자에 의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웃 제나라에서 80여 명의 미인과 120필의 명마를 노나라 왕(정공)에게 보낸다. 선물을 받은 정공은 여색에 빠지고, 정치에 점점 소홀히 하게 된다. 공자는 이제는 노나라에서는 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56세에 노나라를 떠나게 되는데, 제자들을 데리고 수레를 끌고 간다. 이걸 주유천하(周遊天下 : 두루 주, 놀 유, 하늘 천, 아래 하 또는 주유열국)라고 하는데 여러 나라를 잘 돌아다녔다는 말이다. 당시 세상이 중국이라는 믿음 속에 그 안에 각각의 제후국이 있으니 지금의 유럽연합에 비유하면 전 세계 다 돌았다라는 뜻이다. 공자가 떠날 때는 이 여정이 13년간이 계속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3년간 70여명의 왕을 만났으나 아무도 공자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68세에 노나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공자의 주유천하 왜 제자들 다 따라 다녔을까? 왕과 합이 맞으면 공자의 철학을 구현하고 하면 그 제자들이 다 등용되니...

 


위대한 교육자 공자 (공자의 학교이야기)


공자는 동양 최초의 가장 유명한 지식인이였다. 그리고 그 지식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동양 최초의 아카데미를 설립하게 된다. 공자는 자기 고향 곡부에 대학 같은 '공자스쿨'을 세운다. 아카데미의 이사장 겸 교장이 되는 셈이다.

 

이 학교의 교문 현판에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한다. 유교무류(有敎無類 ; 가르침은 있으되 차별은 없다 즉, 배우고 싶은 자 누구나 오라) 그래서 마른 고기 한쪽만 가져올 수 있으면 누구나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급훈쯤 되는 게 위기지학(爲己之學  ; 남에게 보일려고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배워라) 그 당시 교육은 실기 위주의 수업이었다.(현대적 책이 없기에) 대표적 수업방법은 대화 그래서 공부 방법은 대화와 실습이었다. 공자는 학문뿐만 아니라 활쏘기와 음악 특히 거문고에 아주 능하였다고 한다.

 

  

 

 

공자의 제자 孔門十哲(공문십철)

 

사마천에 의하면 학생 규모 3,000명이였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공자의 직계 제자 70명쯤 되고 이들이 이 학교 교수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70명 중 뛰어난 제자 중 10명, 뭐 지금으로 하면 학과장 정도? 이들을 공문십철 (孔門十哲)이라고 한다. 공자 문하의 10명의 똘똘이!
어쨌든 공자는 그 문하생들이 많았다. 그들이 제후국들에 진출하고 스승을 자랑하니까 공자가 뜬 것이다. 물론 자기도 능력이 있었지만 제자들이 5년 연속 만점 배출! 이러면 .... 그래서 제자를 잘 둬야 하고 가능하면 많이 둬야 한다!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 [자 : 안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공자 제자 중 그 똘똘한 제자 10명 중 으뜸은 안회다. 최고의 똘똘인데, 안타깝게도 단명한다. 30이 안되어 죽었다고 하는데, 그 병이 머리가 하얗게 되어서 죽는 병이었다고 한다. 이름은 回(돌 ; 회)이며 자가 淵(못 ; 연)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할 때는 주로 안회라고 하고 우리는 안연이라고 한다. 이 천재를 유교에서는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숭배하기에 안자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안회 때문에 나온 말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이다. 필자 때문에 나온 말은 '하나를 들으면 열이 혼동한다?'

공자의 장례 주관 


그런데 천재는 요절한다고 안연이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그건 공자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하니까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다. 공자의 천하 주유에 동행한 점 등을 보면 실제로는 40대에 죽었지만 공자에겐 아끼던 제자의 죽음이라 요절로 보였던 것. 지금의 40대면 요절일수 있지만 당시에 40대면 늙은 편에 해당한다. 공자가 오래산 것이다. 기록에 안연의 죽음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라“라고 탄식했다고 적고 있고 안연의 장례를 그 시대 예법을 어기면서 스승이 주관하였다고 한다.

 


자로(子路 : BC 543 ~ BC 480), 경호실장 ‘죽음이 뭐죠?’

 

자로는 가장 싸움 잘하는 제자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진, 그래서 공자의 경호실장쯤 되는데 ‘계로’라고도 불렀다. (본명은 중유니까 별명이 두 개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공자보다는 9살이 어린, 공자의 제자 중 가장 연장자였다. 자로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스승님, 죽음이 뭐죠?’ 공자의 대답은 '삶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알겠는가?'였다.

 


자공(子貢 : BC 520 ? ~ BC 456 ?), 재정비서 ‘마이더스의 손’

 

자공은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는 가장 부유한 제자였다. 자공은 최고의 상인으로 마이더스의 손이었다. 손대면 다 성공했다는. 노나라와 제나라의 국경지대에서 물건을 사고 팔아 많은 부를 축적한 중국 최초의 재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공은 재정비서관쯤이고 공자를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준 인물이다. 

 

 

 


증자(曾子 - 증삼 : BC  505~BC 435)

大器晩成(대기만성), 제자 중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 증자다. 가장 능력 없던 제자. 그런데 증자는 공자의 뒤를 잇는다. 대기만성형형 인재!   
증자에게 유명한 말이 ‘일일삼성(一日三省 ; 一 한 일, 日 날 일, 三 석 삼, 省 살필 성) "날마다 세가지를 반성한다."는 뜻이다.   
‘남의 일이라고 해서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키지 못 한 일은 없는가?’ 
‘배운 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은 없는가?’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였는가? 예나 지금이나 학생은 복습을 안해서 선생님들이 언제나 강조하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로 이어진다.)

 

 

공자자로맹자
공자, 자로, 맹자

 

글. 가생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