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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퇴계 이황에 대한 짧은 이해, 음주 사고도 내고! 밥 잘 사주는 멋진 형!

by 연구일인 2023. 2. 13.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분으로 존경받는 퇴계 이황, 딱딱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음주 사고도 내고, 어린 아내를 잘 보살피는 멋진 분이었다는 점...

 

퇴계이황은?

진성 이씨 (이육사의 조상)로 연산군(재위 1494∼1506) 때, 경북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고(1501년), 7남 1녀 중 막내! 진성 이씨! 진성 이씨 중 유명한 분이 ‘광야’를 쓰신 독립운동가인 이육사가 있다.

이황은 독서광이자 채식주의자

태어난 지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러니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어린 시절은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는데, 다행히도 아버지가 방대한 장서를 유산으로 남겨 주어서, 홀로, 책 속에 파묻혀 보낸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끼니를 잊곤 해서 위와 장이 안 좋아져서 고기를 먹으면 잘 체하고, 그래서, 주로 채식을 하셨다고 한다.

 

음주 사고?

과거 시절 철학에 있어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는? 당연 성균관이다. 참고로 서울, 연고 대 출신의 학자를 우리 배운적이 없다. 거의 성균관 출신인데 이황, 이이, 정약용 다 성균관 동문이다. 이황이 성균관 유생시절 한 때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하루는 술에 취하여 돌아오던 중,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으론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살이 찌지 않는 마른 체구

 

이 음주사고 후부터 계속 마르는 병에 걸리셨다고 한다. 그 뒤로 퇴계는 평생 살을 찌지 않는 마른 체구로 지내게 된다. 그래서 천 원짜리 지폐 속의 퇴계는 얼굴이 마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엄격한 분? 아니다 따뜻하고 인자한 분!

 

밤나무일화 
퇴계 이분은 자신에게는 참 엄격했다. 그걸 볼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넘어와 밤이 퇴계의 집 마당에 떨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황은 그 밤들을 모아서 옆집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자녀들이 남의 것을 먹을까 염려해서라는...  한 순간도 삶의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는 유학(도학)자의 삶을 사신 분 1570년 70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는데. 서재에 단정히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퇴계는 이미지는 완고하고, 깐깐한 사람 같아 보이는데, 사실은 조선 유학자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인자한 사람으로 꼽힌다.  
퇴계는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타인에게는 관대한 인물이였던 것. 우리와는 정말 반대의 삶을 사신 분이다.

며느리 재가 일화  
퇴계의 인자함을 찾아 볼 수 있는 일화들이 몇 개 있다. 퇴계의 둘째 아들(이채)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며느리(유씨 부인)는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며느리를 걱정한 퇴계는 며느리를 재가 시킨다. 당시 양반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더욱이 당대의 대학자였던 퇴계의 며느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 일이 있던 몇년 후 퇴계는 한양으로 가던 중 어느 집에 하루 묵게 되었다. 그런데, 내어 준 음식이 퇴계의 입에 꼭 맞는 것들이었고, 갈아 신으라고 준 버선도 발에 딱 맞았다. 퇴계는 의아하게 생각하였는데, 그 집을 나서면서 담 모퉁이에 숨어 자신을 바라보던 옛 며느리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깊이 인사하는 며느리를 뒤로 하고 웃으며 한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큰 며느리도 이황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죽어서도 모시겠다고 하여 이황의 묘소에 올라가는 중턱에 그 묘소가 있다.)

부인 권씨의 제사상 배 일화
퇴계의 두 번 결혼하는데, 첫 부인이 죽고, 결혼한 둘째 부인(권씨 부인)의 이야기다. 할아버지 제삿날. 막내 며느리(권씨 부인)가 제상 위의 배를 하나 치마폭에 감추었고, 큰 동서에게 들킨다. 남편이 대신 형수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나서 아내 권씨에게 묻는다.  
"왜 그랬었어?" 

"먹고 싶어서." 

그러자 이황은 직접 배를 깎아줬다고 한다.

내자식 살리자고 남의 자식을 죽일수 없다!
퇴계 말년에(67세)에 증손자를 보는데, 손자 며느리의 젖이 부족했다. 그래서 막 아기를 낳은 여종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황은 "내 자식 살리자고 남의 자식 죽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결국은 증손자는 죽었고 손자가 원망했을 법도 한데... 하지만 퇴계는 편지를 보내 위로하면서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기대승 (밥잘사주는 예쁜 누나) 일화
퇴계는 아무리 나이 어린 학자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경청하고 자신의 학설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수정하였다. 유명한 일화가 기대승과의 논쟁이다. 대략 퇴계보다 30살 쯤(26살) 어린애인데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대 총장 지낸 대학자와 서울대 학생정도의 관계. 나이로는 아버지와 아들정도의 나이. 그러다 보니 퇴계는 관직 관두고 나서부터가 더 유명해진다. 

존경 받는 대 학자로서 누가 잦아오든 술 잘 사고, 애기 잘 들어주고, 많은 것 가르쳐 주고, 기대승이나 이이같이 개기는 애들한테도 잘해 주시고, 그 성품이 뛰어나다고 세칭 빠들이 많아진다. 거의 컨셉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당대 가장 존경받는 대학자가 세인을 대하는 태도가 그랬다는 것이다.

이황의 죽음(처사 이공 VS 영의정)
1570년 그는 70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는데, 서재에 단정히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벼슬하던 사람이 죽으면 비문에 지낸 관직을 잔뜩 써 놓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이황은 자신의 비문에 ‘처사 이공의 무덤(處士李公之柩)]‘라는 말만 쓰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를 것을 유언을 남겼다.
'처사'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학문만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를 흠모한 선조, 그 무능한 선조는 이런 이황의 겸손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의정의 벼슬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고 한다. 

 

도산서원

 

글. 가생연